공자는 40을 불혹不惑이요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는데 나는 불혹과 지천명 사이 그 어딘가에 있어야 할 나이다. 불혹은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참 어렵다. 지천명은 바라볼 수도 없는 거리에 있고 나이 값 하려면 바람에 나무 몸통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요즘 나를 돌아보면 뿌리가 얕은 것인지 나무의 몸통이 가늘어서 그런것인지 바람에 흔들거린다. 공자는 15세를 지학 또 서른을 이립而立라 하였는데 서른 쯤 되면 스스로 서고 세상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또 이른바 철이라는 것이 드는 나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철이 든지가 십수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세상을 잘 모르겠고 도대체 철이 들지 않았으니 그 나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먹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성경의 욥기에는 고난을 당한 욥에게 찾아오는 욥의 친구들이 있다. 위로하는 듯 하지만 실은 온갖 그럴듯한 말로 욥을 가르치려하면서 아픈이의 마음을 전혀 만져주지 못한다. 욥이 당한 고난이라는 것은 아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을 함께 묶어 놓은 듯한 상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아픔이다. 이러한 아픔 앞에서 인간이, 그것도 친구라는 자들이 보이는 행동은 그저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고 자기 선을 추구하는 모습들이다. 하나님이 왜 욥에게 그런 아픔을 주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욥기 앞부분에 시험에 관한 언급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왜 그것을 허락하셨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알기는 불가능하고 또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헛된 일이지만 욥기를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고난 앞에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고난 당하는 자는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되며, 그 아파하는 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기에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때로는 아파하는 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런 말과 행동들이 자신들의 선을 드러나게 하는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나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의 실존은 어쩔 수 없이 다 똑같이 찌질하며 그래서 인생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욥기 38장을 넘기면서 침묵하던 하나님이 나온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라면서 고통받는 자 앞에서 지금껏 잘난체했던 자들을 꾸짖으면서 등장한다. 이세상의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욥의 아픔에 대한 답을 말해 줄 수 없었지만 그 대답은 결국 하나님께 들어야 한다. 그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언젠가 들릴 수도 있고 또 평생 그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욥기 38-41장에 걸쳐서 나오는 존재의 이유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원래 그런줄 알긴했지만 특별히 요며칠 인간에 대한 절망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교양이나 지적 능력 혹은 그것도 아니면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나이가 인간을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바꿔 나갈거라고 보통은 생각한다. 공자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등으로 나이를 구분했고 나이에 걸맞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불혹이나 지천명이라는 말을 만들었을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인간을 결코 그렇게 만들 수 없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서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절망감으로 답답한 한주간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절망감이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이유라는 것이 내 마음에 살짝 스친다.
Samuel Barber의 Adagio for Strings…절망과 왠지 어울리는 음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