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rchanity, 굳이 한글로 바꾼다면 교회교 라고 할 수 있겠다. Churchanity를 Webster 사전에서는 “일반적으로 특정 교회의 관습과 관심에 대한 과도하거나 협소한 애착” 이라고 정의하며 Collins사전에서는 “기독교 보다는 교회에 대한 충성”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을 churchianity로 설명하려 한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성을 바탕으로 교회 안에서 어떤 종교적 존재로서 자신을 정의하려 하고 종교적 너울에 싸여 살아가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으려한다. 그러한 모습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필요 충분 조건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바로 Churchanity의 모습이다.
교회가 병들고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교회들(또 그 교회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churchianity와 인간의 종교성이 매우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있는 세상으로 “가라”라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교회 안으로 “오라”를 외치기에 Christianity 가 드러날 기회가 없어지고 도리어 인간의 종교성과 욕망으로 잘 버무려진 Churchianity만 부각되고 그것은 결국 세상이 교회를 향해 탄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것이다.
이러한 문제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개교회의 수직적 교회 구조가 Churchanity를 만드는 중요한 요인중 하나일 것이다. 교회는 왜 이렇게 수직적 조직이 되어 버렸나? 교역자, 집사, 장로 등의 직분은 수직적 체계의 조직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functional 한 자리, 즉 역할로서 존재해야 하는데 지금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직분들은 위계적 수직 구조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 해답을 알 수가 없다. Christianity without Churchanity는 과연 불가능한가? 쉽게 예상할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철저히 하나님 앞에 잘 서 있으면 될것 아닌가 라는 것이다. 맞는 말인데 그게 사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Churchianity vs Christianity….디트리히 본회퍼는 예수를 따르는 유일한 길은 이 세상 속에서 사는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사람이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때는 이 세상에서 철저히 살아가고 있을 때 라고 말한다. 본회퍼가 말한 거룩한 세속은 우리의 삶을 철저히 하나님의 품으로 내던져 이 세상에서 그의 고통에 함께 참여해야 하는것이다. 그것이 바로 Christianity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